이인성천재화가, 그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고호!! 39살에 요절한 근대화단의 선구자

2011. 3. 4. 07:30주요 활동/하이서울뉴스취재

반응형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인성 선정-문화관광부-

이인성화가 홈페이지 바로가기-http://www.leeinsung.com
이인성 기념사업회
회장 이 채 원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27-8 TEL:02-508-3977

 이인성천재화가 그를 말한다!  39살에 요절한 근대화단의 귀재-호미숙

  2012년 이인성화가 100주년 기념 전시회 계획

여보게, 우리가 사십대에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낸다는 것은 천재가 아닌 이상 무리한 요구이며 사십대에 대가가 되면 육칠십 대에는 어떠한 작품이 나올지 겁이 나네...-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그림에 대하여 많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한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고 이인성화가의 자제분인 이채원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알게 되는 부친 이인성화가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아! 미술의 대가였던 그 분을 몰랐던 것이 오직 저만이 아니라 대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가 이렇게 블로그 글이라도 써서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삼성에서 VIP에게만 나눠준다는 달력을 아십니까? 2011년 명화 달력에 이인성 화가의 작품이 선정되었어도 자세히 몰랐을 겁니다. 

-삼성은 1997년 마티스를 시작으로 앤디 워홀, 피카소, 샤갈, 클림트, 백남준, 김환기, 이인성 등 주요 화가의 명화 달력을 VIP용 한정판으로 제작하고 있다. 명화 달력은 흔하지만 삼성의 VIP 달력은 일반 펄프 용지보다 10배 이상 수명이 길고 색감이 잘 표현된다는 프랑스 아르셰(Arches)사의 판화용지를 사용한다. 이 판화용지는 일반 달력 용지보다 20배나 비싸다. 삼성 관계자는 “달력을 다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그림만 오려 액자에 넣어도 손색이 없게 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삼성의 명화 달력은 삼성문화재단 외부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작가를 선정하고 매년 5만부만 제작해 VIP에게 배포한다. 리움박물관에서 기념으로 일부 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은 8만원이다.-기사참조- 

그리고 이인성 화가의 홈페이지에서 하나, 하나 꼼꼼하게 작품들을 감상해보고 그동안의 그 분에 대한 많은 자료를 공부했습니다. 웹 검색을 통해서 이인성 화백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동안 우리사회가 이인성화가의 천재적인 것에 대하여 널리 알리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인성(李仁星 1912~1950)대한민국의 “고호“ 천재화가 

한국 근대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9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 박수근 등이 국민적 화가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조선미전 연속 6회 입선(1931-1936) 이후 불과 26세의 나이로 추천 작가에 올랐던 이인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이인성이 우리 근대화단의 신미술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에 설 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첫째, 초창기 근대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다는 점, 둘째,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정물화나 풍경화도 많이 제작하였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박상옥, 류경채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래에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과 아내와 딸, 여학생 등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모델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 개성 넘치는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되고 전시되는 기회가 좀더 자주 생겨 그에 대한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질 것을 기대해 본다. 

이인성(李仁星, 1912-1950)

1912년 8월 28일일 대구 출생

1928년(17세) 수창보통학교 졸업,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년(18세) 수채화 “그늘” 제8회 선전 입선

1930년(19세) 향토회 참가(1934년까지), 제9회 선전 “겨울 어느날” 입선

1931년(20세) 제10회 선전 “세모가경” 특선, 일본 퀸 크레옹 회사 입사

1932년(21세) 태평양미술학교 입학, 제11회 선전 “카이유” 특선, 13회 제전 “여 름어느날” 입선

1933년(22세) 제12회 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23세) 제13회 선전 “가을 어느날” 특선, 제15회 제전 “여름실내에서” 입 선

1935년(24세)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6년(25세) 제17회 일본제전 “한정” 입선, 이인성양화연구소 개소

1937년(26세) 제16회 선전부터 추천작가 선임 및 출품

1945년(34세)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

1947년(36세)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 출강

1949년(38세)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년(39세) 6.25 당시 작고

 

1998년 월간미술 주간 <근대유화베스트10>에서"경주의 산곡에서"1위 선정

2000년 호암갤러리에서 작고50주기 회고전개최

2000년 <<이인성 미술상>>조례제정 대구

2002년 문화관광부2003년11월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이인성 홈페이지에서-

  -----------------------------------------------------------------------------------------------------------------------------------------

천재의 요절 글 최인호 - 한국일보 1974년 6월 5일 <젊은이 세계>

"누가 天才를 쏘았는가…"
해방직후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벌어져 드디어 정판사건이 터진 서울의 밤 일곱 시께.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주위의 정적쯤은 아랑곳없이 기분 좋게 취한 그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사내는 놀란 듯 우뚝 선다.
『누구냐.』
『지나가던 취객이요.』
『뭐라구. 지금이 무슨 시간인데 장난하려 들어. 누구야.』
『취객이요. 술취한 취객이요.』
사내는 껄껄 웃어제낀다.
『웃지마라. 누구야.』
『나말이요.』
손전지 불 밑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생각 보다는 곱게 생겼다.
악의없는 참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치안대원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지. 정지. 누구야.』
『나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李仁星)이요.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요.』
『뭐라구.』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혹시 고위층의 인물인가 행여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 준다. 그러나 그 치안대원은 좀체로 치밀던 화가 풀리지 아니한다. 그래서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알어.』
『알지.』
앉아서 사무근무를 하던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 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좀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취해 자리에 누워있던 이인성은 옷도 채 입기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사내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온다.
『더러운 쌕끼.』
가슴에 품었던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튀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발의 총성이 정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이상은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죽는 순간을 나 나름대로 소설체로 표현해 본 것이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기쁨에 술취해 돌아오던 이인성은 같은 동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 그 손끝이, 그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 일본인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이인성의 마술적 재능이 총한방에 죽고 말았다. 자신을 서슴지않고 천재라고 표현하던 이인성이 통행금지에 걸려 죽었다.

환쟁이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십년이 흘러간 지금 그의 그림은 남아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천재의 재능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따지지 말라. 예술가가 무슨 특권이 있다고 통행금지 이후에 다닐 수 있담 하고 따지지 말라.

자기가 뭐라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통행금지 이후 다닌담 하고 따지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천재화가를 죽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메고 가는 예수를 찬미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향해 돌을 던졌던 바리새인을 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시대에 살아있었다면 그시대의 이단자인 예수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을는지 모른다.

이조백자는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예술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그들을 백정 취급하였다.  그들을 따로 살게 했고, 그들끼리 혼인케 하였으며, 열병걸린 전염병환자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빚었다. 그들의 한을 도자기로 빚었다. 수백년 지나서 그 이조자기는 그들을 멸시하였던 우리들의 유일한 자랑스런 유산으로 남아있다. 우리 문학의 고전도 마찬가지다.

춘향전도, 흥부전도, 심청전도 멸시받았던 하위계급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구화문학이다. 말하자면 하위문화들의 소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배운다. 배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왜 그들을 죽은 다음에 추모하는가.
왜 이인성이 죽은 지금에 그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가.
왜 그들을 우리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살아서 명동에서, 무교동에서 술취한 이인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왜 살아있는 천재 이인성이 우리 곁에서 시대의 예언을 내려주는 그 신의계시를 듣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아소트리아스의 경우처럼 - 그의 집 1㎞ 근처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붙어있다고 한다. 여기엔 우리의 위대한 작가 아소트리아스가 글을 쓰고 있는 구역입니다. 경적을 삼가해 주십시오 라고. -
거국적인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죽일 필요야 없지 않는가.
예술가는, 천재의 예술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나는 총을 쏘지 않았다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하층계급을 멸시했던 양반계급이 아니야 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니까라고 자위하지 마라.
먼훗날 그대들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예술가와 더불어 살지 못하고, 예술가를 추모만 했었던 바보와 같은 할아버지들이었다고.

(중략)

예술가를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천재들을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이웃으로서 그들의 숨결을 들으며 살고 있다. <來週水曜字에 계속> 

글 최인호 - 한국일보 1974년 6월 5일 <젊은이 세계> 


<이인성 화가 관련 동영상>
 http://www.leeinsung.com/movie_explor.html  http://www.leeinsung.com/movie_genius.html
 << 문화탐험 오늘 >>  << 근대화단 귀재 >>


<서울 강남 논현동 한우리한정식에서>
 
이채원 이인성 기념사업회장과 최주혜 한국여성크럽회장
삼성 명화달력을 전달하며 기념촬영
 
이채원 이인성 기념사업회장의 자필 사인 엽서 카드
 
호미에게 건네 준 토끼그림 카드
 
지인들과 함께





                                            
                                    이인성화가의 작품 전시


붉은 배경의 자화상(Self-Portrait in Red)
1940년대, 18X10.5cm, 나무판에 유채



<해당화 : Sweet Brier Flowers>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1944, Oil on canvas, Collection of Ho-Am Art Museum, Yongin




<어촌(덕적도 풍경 : Fishing Village)>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개인소장
later 1940's, Oil on canvas




<백장미 : White Roses>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1940, Oil on wooden board



<풍경 : Landscape>

1930년대 중반, 나무판에 유채, 24x33cm
mid - 1930'0, oil on wooden board




<온일 : Warm Day>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x90cm
mid - 1930'0, Watercolor on Paper








아리랑 고개
1934, 57.5X77.8cm, 종이에 수채, 호암미술관 소장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정물(해당화)
1940년대 후반, 48.5X31.5cm, 종이에 수채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35.5X45cm,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원본보기=http://homihomi.tistory.com/600

오마이뉴스 블로그 2.0[널리 퍼지는 나의 목소리]
고 이인성화가는 가셨어도 그의 예술혼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추천 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