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한국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실크로드와 둔황[국립중앙박물관]

2011. 1. 23. 04:39자전거 이야기/자전거랑(~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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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실크로드와 둔황-호미숙


하얀 사막 같은 눈길에 발길을 옮기며 국립중앙방물관에 들어선다. 추위에 얼어붙은 거울 연못 위에 황금 노을에 반사되어 더욱 멋스러운 청자정을 휘감은 겨울바람이 차갑기보다는 뜨거운 사막길을 나섰던 서역인들의 향해 들어서는 느낌이다. 1300년 전, 혜초스님의 발자취 따라 떠나는 길,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모래 사막을 거닐듯 황량한 바람을 맞선다 

용산으로 중앙박물관을 옮긴이래 1500만 명이 관람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에 뜻 깊은 곳에 매번 찾아 올 수 있음에 의미가 새롭다. 

실크로드는 고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문명 교류의 젖줄이었다.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은 실크로드를 구성하는 3대 간선도로(중앙아시아 일대 여러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 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과 오아시스로를 따라 펼쳐진 동서를 잇는 통로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중국 실크로드 대표 지역, 특히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의 실크로드는 서역에서 둔황을 거쳐 장안에서 동쪽으로 신라 경주까지 이르는 삶과 문화를 교류한 역사의 길이다.  

최고의 전시작품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으로 727년 혜초가 기록한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이래 1,283년 만에 한국에 최초 공개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혜초의 여정을 따라 펼쳐진 실크로드 주변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혜초의 오언시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에 대하여 

704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는 약관의 나이에 바다를 통하여 인도에 도착하였다.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혜초가 인도를 향한 목적이었다. 성지 순례를 마친 혜초는 서쪽으로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갔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혜초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11월 상순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에 도착하였다. 인도를 향해 중국을 출발한 지 수 년이 지난 후였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40여 곳에 대해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혜초는 한 권의 책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막고굴 제 17동굴 복제동굴(모형) 이란?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많은 둔황문서들이 발견된 곳이다. 지면에서 동굴 꼭대기까지 높이는 3미터이고 정면 벽에는 사각형의 낮은 단이 붙어 있다. 단 위에는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상이 조소되어 있다. 가사를 입고 장엄한 표정을 한 지혜로운 승려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절에서는 오랫동안 대량의 불경과 불화, 법기, 기타 종교문서와 사회문서 등을 가지고 있었다. 11세기 그것들을 이 동굴에 몰래 숨겨두고, 담을 쌓아 굴 입구를 막고, 벽면에 벽화를 장식했다, 속칭 ‘장경동’이라한다. 

왕오천축국전이 어떻게 발견 되었을까? 

1900년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이 문이 열렸다. 둔황 천불동에 머물던 왕원록은 우연히 3미터가 넘는 높이까지 수많은 두무마리가 쌓여 있는 작은 석식 하나를 발견하였다. 현재 ‘17호굴’ 또는 ‘장경동‘이라고 부르는 이 석굴 안에는 11세기 이전의 각종 자료들이 가득 차 있었다.’둔황문서‘의 발견이었다.

현재 둔황문서는 중국을 비롯한 영국, 인도, 프랑스, 일본, 러시아, 미국, 한국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다. 문서의 수량은 확인된 것만 4만점이 넘으며, 가장 이른 것은 4세기 가장 늦은 것은 11세기에 해당한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 문서이며, 90%는 불교 관련 문헌이다. 그 외에도 호탄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로 된 자료가 포함되어 있으며, 유교와 도교, 마니교, 경교, 및 관청문헌 등이 전한다, 둔황문서는 둔황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왕오천축국전을 어떻게 확인했을까? 

1908년 펠리오가 처음 두루마리 상태의 [왕오천축궂전]을 발견하였을 당시 이 책은 앞뒤가 떨어져 나가 책의 명칭이나 지은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예전에 읽었던 혜림의[일체경음의]에 인용되었던[왕오천축국전]의 단어를 기억하고, 이 문서가 바로[왕오천축국전] 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이 내린 하얀 거울못과 푸른 청자정 그리고 노을
청자정-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상징물로 건립한 청자정은 고려 의종11(1157)년 대궐 동쪽의 별궁에 양이정을 짓고,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청자정 건립을 위해 전남 강진 사당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기와와 고려시대 유물을 바탕으로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으며, 정자의 명칭은 국민공모를 통하여 청자정이라 정하였다.

노을이 지는 무렵, 거울 못 넘어로 저녁 해덩이가 붉은색을 토하더니 사그러지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계단에 그려진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행렬

국립중앙박물관, 2010년 관람객 300만 명, 용산 이전 후 1,500만 명 돌파!!

계단에 그려진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행렬 그림에 올라탄 어린이들 


 
카슈가르, 쿠차, 투루판, 누란, 둔황, 장안

실크로드와 둔황

실크로드는 고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명 교류의 젖줄이었다. 문명의 발생 이후 동서 문명의 교류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 유라이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 유라시아대륙 남쪽 바다를 이용한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흔히 실크로드 간선도로라고 한다.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19세기말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비단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를 실크로드(비단길)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실크로드의 개념은 시리아. 로마로까지 점차 확장되었다. 이 길은 주로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에 대항하였고. 3대 간선도로 가운데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학을 담담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의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 문명교류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한다. 이 길은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서역’에서 둔황을 거쳐 동방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장안에 이른 후 다시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까지 이어진다. 또한 8세기 초 신라의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따라갔던 그의 여정은 현재의 우리와 실크로드를 가깝게 이어준다.

1부 -실크로드의 도시들


삼채낙타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당삼채 낙타이다. 등에 봉이 하나 있는 낙타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서식하고. 봉이 두 개 있는 낙타는 고비사막, 몽골.알타이 지역 등 아시아 내륙에 분포하였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실크로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관람하는 사람들

[다시 소륵으로부터 동쪽으로 할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이곳은 곧 안서대호도부로서 중국 군대가 대규모로 모여 있는 곳이다.
구자국에는 절도 많고 중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왕오천축국전 중에서-

 경교석비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와 관련된 비석으로 위에 검은색 십자가 도안이 새겨져있다. 기독교도의 무덤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는 7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공양인 두상

공양인은 부처나 보살에 향기로운 꽃과 등불, 음식, 의복 등을 시주하는 살마을 말한다, 머리에 복잡한 형태의 터번을 말아 넣고 풍부한 수엽을 기른 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상에 나타난 수염과, 눈썹, 코 부분과 전체 얼굴 형태가 입체감이 강하여 중원 한족과는 다르다.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길이다.
그 길을 통해 문명과 문물이 전해지고.
발전하고, 사라져갔다.

국제상인, 소그드인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 시르다리아 두 개의 강 사이에 위치하는 오아시스 도시에 살았다. 이들은 실크로드의 요충자리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실크로드의 동서를 잇는 육상의 중계무역을 주도하였다. 소그드인은 중국의 수도 장안을 비롯하여 무역의 주요 대상자인 투루판, 하미, 둔황 등지에도 집단 거주하였다. 이란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소그드인의 종교는 공대 이란 문화를 대표하는 조로아스터교였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 상인의 활동을 따라 사방으로 전파 되었다.동서 교역을 주도하였던 소그드인의 활약으로 소그드 문자 역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소그드문자는 이후 위구르. 몽골문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들의 생활 용품 도구들(털모자. 주머니, 나무 머리빗)

-서역남도-

서역남도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연결하는 길로 호탄, 케리야, 니야, 체르첸, 누란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누란의 샤오허묘지에는 기원 전 2000년 전 이곳에서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역남도의 호탄 케리야, 이란 등에서 서역 지방에 전파된 초기 불교의 사원 건축에 많이 남아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인이 선호했던 호탄의 옥은 이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향하였고 중국의 비단 역시 초기에는 이 길을 통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2부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

비단은 서쪽으로

기원전 1세기경 비단을 처음 접한 로마인은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화려함에 매료 되었다. 중국의 비단은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되었다. 비단의 직접 생산은 로마뿐만 아니라 비단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을 얻고자 했던 실크로드 지역 모든 도시들의 공통된 욕구였다.

중국비단의 직조 기술은 서역을 통해 서쪽으로 페르시아에 전파되면서 커다란 변환을 겪었다. 중국의 전통 비단 직조기술은 한금이라고 하는 날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경금이엇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에서는 씨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위금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직조 방식은 중국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무늬의 직조가 가능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위금 기법은 중국으로 전해졌고, 당금이라 불리는 중국식 위금으로 발전했다.



유목민의 전통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지대는 말을 타고 양과 염소 등의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생활이 발달하였다. 유목생활은 가축과 함께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서늘한 산 정상지역에서 지내며, 겨울에는 따뜻한 저지대로 이동하는 등 정기적으로 생활 거점을 바꾸는 것이었다.

유목민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그들이ㅡ 기본 자신인 가축에 의존한다. 농경을 주로 하는 민족과는 달리 육류를 기본적인 식량으로 한다. 의복 또한 주로 가축의 털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이동에 편리한 조립식 텐트(겔)에 거주한다. 유목민들에게 동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정신력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들은 뼈, 나무, 금속, 등으로 각종 동물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날짐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제 고리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동물이 서로 마주 보고 엎드려 있는 둥근 동기 이다. 호랑이의 머리를하고. 귀는 위로 섰으며, 짧은 갈기를 가졌다. 한 쌍의 뿔은 뒤를 향해서 올라가 있고, 등 양측에 한 쌍의 날개가 달려있다. 원통형 안은 비어서 안쪽으로 열려있다. 종교의식에 사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탄-가장 부흥했던 나라
호탄은 중국 바깥에서 최초로 비단을 생한한 곳이라 전해진다.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5세기 경 호탄의 국왕은 비단의 제조기술을 알기 위하여, 중국 황실과 혼인을 청했다. 국왕은 결혼할 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는 비단을 만들 수 없으니, 공주가 직접 만들어 입어야한다" 고 전하였다. 왕의 뜻을 알게 된 공주는 자신의 머리 장식에 뽕나무 종자와 누에고치를 숨기로 호탄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호탄의 비단 직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제 납골기

진흙으로 만든 붉은 색 도기로, 발견 당시 안에 해골이 있었다. 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지어로 ‘웃으아리’ 라고 한다. 웃으아리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그드인의 일반적인 매장 방식이었다. 특히 소그드인들은 깔끔했으며 사체가 부패하며 흐르는 물까지도 따로 흐르도록 물길을 터 냈을 정도라 한다.

샤오허 묘지

샤오허 묘지 나무로 만든 사체. 행방을 모르는 사람들의 무덤을 만들 때 이런식으로 나무로 사람모형을 만들어 모든 수장품고 함께 넣었다한다.

해골을 넣는 주머니


4,000년 전의 기억-샤오허 묘지

2002년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누란의 옛 성터 서쪽에 4,000년 전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언덕 위에 수백 개의 무덤들이 쌓여 있었다. 무덤 위에는 메마른 나무들이 촘ㅊ모하게 박혀 있었다. ‘누란의 미녀’라고 불리는 젊은 여인의 시신을 비롯해 이곳에 묻힌 사람들의 인종은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무덤 주인공들의 문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1,000 년 이상이 흐른 후 이 지역에는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역사책에서 서역 36개국의 하나로 ‘누란’이 나타나지만, 양자 간의 연관은 확인되지 않는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 이라는 의미를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은 사람이나 짐승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오는 물에 의지하여 사막에 오아시스 도시를 만들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3부 -둔황과 왕오천축국전-

현세의 삶이 이어지다-아스타나 고분 

현재의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3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지하에 조성된 수백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을 뜻한다.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 듯, 무덤의 사방 벽면에는 자신들이 생전에 누리고자 했던 삶을 그려 놓았다. 아스타나 고분 가운데에는 중국 중원에서의 삶을 동경하였던 사람들이 무덤이 만ㅇ히 있다. 이들이 무덤에서는 중원에서의 삶을 표현한 그림들이 출토된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각종 인종의 인형이 많이 출토 되었는데, 이는 생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표현하기 위하여 대량의 인형을 부장했던 중국 장례문화의 전통과 일치한다.



 
중국 고대신회에 나타나는 남녀신인 복희와 여와를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복희는 왼손에 사각형을 그리는 도구인 구를 왼쪽의 여와은 오른손에 원을 그리는 도구인 규를 가지고 있다. 모두 천지창조를 위한 도구로 불려진다. 두 신의 머리 중앙에는 빨간 핵이 있는 둥근 태양을 배치하고, 아래쪽에는 두꺼비 머리가 있는 둥근 달을 그리고, 주위에는 각종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 시체나 관을 덮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지혜의 미식은 혀이고, 혀의 미식은 언어이며, 사람의 미식은 얼굴이고, 눈은 얼굴의 미식이다.

무덤을 지키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동물인 흙인형
악령 등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짐승 모양의 신상으로, 흔히 진묘수라고 한다.

구리 안대
툴토당시 죽은 사람의 눈 위에 놓여있었다. 안대의 중앙 양쪽 눈 부분에 좁은 구멍들이 있어 바깥 물건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바람과 모래를 막는 역할도 가능하였다. 실제 이러한 눈가리개를 하면 시계가 좁아지고 어두어지기 때문에 선글라스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채색토기 

배가 불룩하고, 바닥이 평평한 토기이다, 그릇 아랫부분에는 연꽃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 윗부분에는 연꽃이 엎어져 있는 모습이 장식되어있다. 뚜껑은 진흙으로 만들어 구멍을 막았고, 꽃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불교는 동쪽으로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는 간다라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로 전파되었다. 서역 지방에 전파된 불교문화는 우선 서역남도 지역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원건축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이후 불교문화의 중심이 점차 서역북도로 옮겨가며 평지 시원건축과 더불어 석굴사원이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는 실크로드의 각지에서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불교미술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6~7세기경에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쿠차의 키질 석굴,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둔황의 천불동 등은 그 대표적이 예이다.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석굴사원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장엄된 벽화 및 조각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상 틀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을 찍기 위한 석고 틀이다. 호탄지역에서 불교를 주제로 한 석고 틀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파미르에서 석고가 많이 생산된 것과 관게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래상 벽화들

카라 서원(복원 모형) 

중앙의 사각형 대좌에는 돔 지붕의 불탑이 놓여있는데 그 위에 나무 기둥이 통과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정사각형으로 사면에 각각 좌불이 놓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방의 벽면에는 위 두 줄에서 두 줄은 좌불 아래의 한 줄에 입불 그려져 있다. 이 주변으로 외곽으로 불전의 벽을 둘러싼 길이 있다.

여래좌상 

눈과 백호에 베푼 은상감, 활 모양의 눈썹과 눈동자에 검은 물질을 넣는 기법, 왼손 5지와 오른쪽 제1지를 붙이는 형태의 설법인 연화좌와 수미좌를 상하로 구성한 대좌등이 카시미르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왕오천축국전 

둔황과 왕오천축국전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서역북도와 사막 남쪽의 서역남도가 동쪽에서 서로 만나는 곳이다. 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고, 서역이 시작하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오래 전부터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한 번영의 상징이 바로 명사산 기슭의 둔황 천불동이다. 둔황을 오가던 대상들은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이들 석굴을 조성하고 각종 불화를 그려 놓았다. 1900년 둔황 천불동 17호굴에서 발견된 둔황 문서는 둔황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등 중앙아시아의 탐험가들이 둔황 문서를 다투어 자신의 나라로 가져갔다.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 이라는 의미를 가진[왕오천축국전] 역시 펠리오가 가져간 둔황 문서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마차행렬

뿔이 하나 달인 동물 유니콘 

청동으로 만든 해치이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독각수’ 라고도 불린다. 해치는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 성이 나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편을 뿔로 가리키거나 물어 버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뿔로 찍어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해치는 공명정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막고굴 17 동굴 모형



막고굴 275 동굴(복제동굴 모형)


보살입상
여래좌상

왕오천축국전 원본-한국에 최초로 공개 되었다

4부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둔황에서 동쪽으로 란저우를 거쳐 장안에 이른다. 둔황에서 란저우까지는 남쪽으로 치렌산맥, 북쪽으로 고비사막이 1,000km 정도 펼쳐져 있는데, 이를 하서회랑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서회랑 동남쪽의 닝샤 역시 오래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흉로 계통의 유목민 전통도 갈아하게 남아 있었다. 중국 문화화 흉로 계통의 유목민 문화가 결합되어 이 지역은 실크로드 상의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문물과 교환 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에까지 이르렀다.



무덤에 있던 무사 흙인형

금관장식



로마 금화
유리잔은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 된 유리잔과 똑같은 모습이다.

포도넝쿨의 암막새-경주에서 발굴된 포도넝쿨 암막새.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풍요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포도무늬는 넝쿨무늬(당초문)과 함께 어우러져 통일신라의 암막새를 장식하다.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포도무늬는 서아시아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크로드와 경주의 관계는?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장안에 집결되어, 서역으로 향하는 중국 문물과 교환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중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직접 서역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신라 고분에 나타나는 유리제품과 황금 제품 등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의 문물이 경주에 많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특히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약 20여 점 이상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로만 글라스계통으로 보인다.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이나 조각에서는 신라인의 눈에 비추어진 서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관람시간-
,목,금요일 오전 9시 ~ 오후 6시
수, 토요일 오전 9시 ~ 오후 9시
일요일,공휴일 오전 9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2011년 1월 1일 휴관
2010.12.18(토) ~ 2011.04.03(일)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http://www.museum.go.kr/

원본주소-http://homihomi.tistory.com/532

한국 최초로 공개되는 왕오천축국전을 꼭 관람해보세요~ 추천 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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